고구려 : 고구려의 건국과 위나라와의 결전
BC37년 주몽은 졸본 오녀산성에서 고구려를 건국한다. 그의 아들 유리왕이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긴 뒤 장수왕이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까지 400년동안 그곳을 기반으로 발전한다. 6번째 왕인 태조왕때부터 본격적인 정복활동을 시작하는데 그는 주변국인 옥저를 병합하고 동예를 공격한다. 고구려는 5개의 부족의 연맹체였는데 왕족과 왕비족이 있었다. 왕이 죽거나 폐위되면 왕족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 다음 왕이 되는 풍습이 있었다. 그리고 왕비는 왕비족에 속한 사람 중에서 선발했다. 그러나 9번째 왕인 고국천왕 때에 이르면 왕권이 크게 강화되어 왕위 부자 상속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로인해 고구려는 더욱 중앙 집권화된 국가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고 왕이 귀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11번째 왕인 동천왕때가 되면 중국은 위,촉,오 세 나라가 서로를 견재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동천왕은 위나라와 동맹 관계를 맺었다. 위나라와 고구려 사이 요동에는 공손연이 있었는데 공손연이 오나라의 손권과 동맹을 맺고 위나라를 위협했다. 위나라는 고구려에 공손연을 협공하기를 요청했고 고구려는 이에 응했다. 고구려와 위나라의 협공 결과 공손연은 멸망하고 공손연 세력은 위나라에 흡수되었다. 공손연이 멸망하고 위나라와 고구려의 국경이 맞닿게 되자 이 둘은 점점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 결국 242년 동천왕이 먼저 위나라의 서안평을 공격했다. 공격받은 위나라는 복수를 위해 244년에 관구검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했고 고구려는 수도가 함락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동천왕은 위나라를 물리치고 수도를 금방 되찾는다. 259년 위나라의 울지해 장군이 다시 고구려에 쳐들어 왔으나 고구려의 12번째 왕 중천왕이 기병 5천 명으로 위나라 군사 8천명을 학살하면서 위나라와의 전쟁은 끝이난다.
삼국지에서 유명한 제갈공명은 고구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고구려인들은 호전적이고 고구려의 지형은 험준하며 고구려인들은 단합력이 높아 무력을 사용해 복속시키기 어렵다. 따라서 고구려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공작 활동으로 내부의 갈등을 증폭 시킨 다음 외교나 군사 작전을 통해 굴복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