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와 문화

고수 전쟁 배경 및 요약

King Attila 2021. 5. 29.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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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배경

*중국
한나라가 멸망한 후, 중국 대륙은 혼란을 겪었다.
수왕조는 589년에 중국을 통일했고 주변 모든 민족이 수나라에 복종했다.

*한국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고조선 땅에 한사군을 세웠다. 한사군은 군사력을 가진 4개의 행정구역이었다.
고구려는 부여의 주몽에 의해 BC37년에 세워졌고 살아남기 위해 한사군에 대적하며 성장했다. 환경이 척박했기 때문에 고구려인들은 매우 호전적인 성향이었다고 한다. 고구려는 한사군을 멸망시키고 부여를 흡수했다. 이후 고구려는 만주 평야를 차지하고 그곳에서 말을 기르고 많은 철을 생산했다. 그 결과 고구려군은 강력한 철기병을 자랑했다.

2. 제1차 고수 전쟁
고구려의 보호를 받던 거란족과 여진족은 고구려를 배반하고 강대국인 수나라에 항복했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껴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수나라에 쳐들어갔다.
수나라 황제 양견은 기다렸다는 듯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것이 고구려의 첫 번째 전쟁이다. 수나라는 이 전쟁에서 90%의 병력을 잃고 퇴각했다고 한다. 이후 수나라의 양광은 604년에 그의 아버지와 형을 죽인 후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수양제다.

​3. 제2차 고수 전쟁

수양제는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113만3800명의 전투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했고, 보급 병력은 200만 명이 넘었다. 611년 총 3백만 명 이상의 병력이 이 전쟁에 동원되었다.
그것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이었다고 한다.
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는 살수 대첩이었다. 수나라 군은 고구려의 국경 지대를 돌파하지 못했고 수양제는 30만 명의 특수군을 따로 편성하여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으로 진격시켰다. 즉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로 특수군만 따로 보낸 것이었다. 이 작전은 고구려군이 언제 성문을 열고 나와 특수군의 뒤를 칠지 모르는 위험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수양제는 전쟁이 길어지면 보급이 어려워지고 전쟁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고 이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고구려군은 수나라의 특수군이 살수강을 건널 때 기습 공격을 가했고 수나라군은 혼비백산하며 달아났다. 도망을 가며 죽은 수나라군도 매우 많아서 이 전투 결과 특수군 30만 명 중 2,700명만이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 수나라는 고구려의 성을 하나도 점령하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 수나라는 고구려를 두 번 더 침략했지만 다 실패했습니다.
이로인해 수나라의 국력은 매우 약해졌고 반란이 일어났다. 수양제는 부하들에게 살해당했고 중국은 당나라에 의해 재 통일되었다.

4. 뒷 이야기
고구려는 왕자들의 왕위 다툼으로 내분이 일어났고 이때를 틈타 고구려를 공격한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에 의해 멸망한다. 그 후, 당나라는 신라를 집어삼키려고 했지만 신라에 의해 저지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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