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고대 한반도 국가 중 가장 섬세하고 세련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세워졌고 660년 멸망한 나라였다.
백제의 건국자는 주몽의 재혼녀인 소서노의 아들 온조라고 한다. 주몽은 고구려를 세우기 전 부여에 있을 때 예소야와 결혼을 해서 유리를 낳았었다. 유리가 성인이 되어 주몽에게 찾아오자 주몽은 유리를 후계자로 선택했다. 소서노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는 이에 실망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고구려를 떠났다. 비류와 온조 형제가 함께 남으로 내려와 각각 비류는 인천에 나라를 세웠고 온조는위례(경기도 하남 추정)에 도읍을 세웠다. 인천에 나라를 건국한 비류는 나라 운영이 잘 되지 않자 자살했고 그 나라는 동생 온조에게 병합되었다. 백제의 중심지인 한강 유역을 포함한 곳은 마한의 영향권이었다. 마한은 54개 국가의 연합이었고 그것의 수장국은 목지국이었다. 백제는 마한 연맹체의 구성국가로 시작해서 목지국을 무너뜨리고 마한의 소국들을 모조리 병탄하여 자치권을 빼앗았다.
백제는 전성기 이전까지 고구려와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 하지만 369년 근초고왕 때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를 공격하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다툼이 시작되었다. 2년 후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황해도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고국원왕이 전사(371년)하는 치욕을 겪었으며, 이후 고구려는 백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백제의 왕권은 강한 편이 아니었다. 백제는 마한을 통합했지만 여전히 지방 세력들이 독립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하는데 지방 세력의 도움을 받지 못해 신라와 일본의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고구려와 신라는 강력한 왕권이 있었는데 그 덕분에 지방 세력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수월했다. 이것이 백제가 삼국 중 제일 먼저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백제 자체는 강력한 국가였으나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이 지속되고 지방 세력의 배신이 잦은 것이 백제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백제가 선택한 것이 일본과의 동맹이었다. 그것은 일본 최초의 국가 야마토였다. 백제는 배신을 일삼는 지방 세력들보다 차라리 일본을 더 믿었고 일본과의 동맹을 더 중요시 여겼다. 그리고 일본인들을 고구려 및 신라와의 전쟁에 이용했다.
일본 입장에서도 백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였다.
4세기 이후까지 야마토는 작은 연맹국가였지만 백제, 가야와 정치적으로 밀접하게 협력관계를 맺었으며 그들로 부터 문자, 철기, 건축, 농사법 등 각종 선진문물들을 신속하게 도입해나갔다. 이 시기에 백제가 일본에 전해준 문물은 건축, 토목, 제철, 목마, 양초, 직조, 양응, 의약, 음악 등 매우 다양했는데, 생활에 필요한 분야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일본 사회가 일상생활에 필요하면서도 생산력을 높일 수 있는 문물을 백제로부터 받아들인 것을 보여준다. 이후 야마토는 일본 내 타 부족국가들과 연맹국가들이 넘볼 수 없을 만큼 강성해졌다. 이를 토대로 주부나 시코쿠, 산인, 간토 등 다른 지역에 존재했던 부족국가와 연맹국가들을 차례로 복속시켰고 7세기 무렵이 되면 큐슈 서북부와 간토 지역에 이르는 넓은 영역을 통합시킬 수 있었다. 백제와 일본은 결혼 동맹을 통해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이로인해 백제 계통의 왕자가 일본의 천황이 되기도 했다.
백제와 일본의 밀접한 동맹 관계는 신라를 공격할 때 백제에 지원 병력을 파병하여 적극적으로 돕는 모습으로 난다. 그리고 백제가 신라에 의해 멸망했을 때 일본이 백제의 부활을 위해 백강 전투에 온 국력을 쏟아부어 군대를 보내기도 한다. 실제 백제계 유민들이 나라를 잃고 상당수가 새롭게 정착한 곳도 일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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