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와 문화

바티칸과 고려의 비밀2 : 영화 쌍화점 해석

King Attila 2021. 5. 29.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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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3년 기황후는 공녀로 원나라에 가서 궁녀가 되었다. 당시 고려는 몽골 통치하에 있었고 매년 일정 수의 처녀를 공녀로 원나라에 보냈다. 원나라에 간 공녀들은 대부분 궁궐에 들어가 궁녀가 되었다. 기황후는 몽골 혜종의 후궁이 될 정도로 아름답고 학식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녀는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낳고 원나라의 황후가 되었다. 그녀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는 나중에 북원 제국의 황제가 된다.

교황이 고려에 편지를 보낸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고려 출신에 황후가 된 기황후 세력이 원나라에서 권력을 키웠기 때문에 그가 고려와 외교관계를 수립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동양에서는 한 집안에서 황후가 나왔을 때, 그 집안의 많은 사람들이 중요한 관직을 차지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기 때문이다.

고려에 남아 있던 기황후의 집안 사람들 또한 고려에서 엄청난 권력을 갖게 되었다. 기황후가 원나라에서 황후 자리에 올랐을 때 고려의 왕은 공민왕이었다. 그는 몽골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개혁 정책을 펼쳤는데, 기황후 집안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런 개혁 정책들을 반대했었다.

영화 '쌍화점'에서 공민왕은 동성애자로 등장하고 자신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한다. 이것은 모두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 영화에서 여왕 역할을 맡은 송지효는 원나라의 공주였다. 당시 고려의 왕은 원나라의 공주와 결혼을 했어야 했다. 즉 원나라의 왕이 장인이 되고 고려의 왕이 사위가 되는 형태였다. 공민왕과 결혼한 공주는 원나라의 노국공주였고 그녀는 공민왕과 매우 좋은 사이였다고 한다. 그녀는 공민왕이 반대파가 보낸 암살자에 의해 살해되기 직전에 자신의 몸을 던져 암살을 막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만약 원나라의 공주인 자신이 다친다면 원나라에서 조사단을 파견할 것이고 이것을 두려워한 자객들이 함부로 칼을 못 휘두를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민왕과 노국 공주와의 사이에서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공민왕이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돌았고, 이것을 소설로 쓴 것이 '쌍화점'이었다.

공민왕은 기황후의 가족을 제거하고 원나라의 간섭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기황후 일가를 영화에서 제거하는 장면은 역사적으로 볼 때 사실이다. 공민왕은 노국 공주가 죽자 깊은 슬픔에 빠졌고 우울증에 걸리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반대파에게 암살 당했다고 한다.

공민왕 이후 원나라의 힘이 점차 약화되어 고려의 왕들이 개혁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파 세력에 의해 번번이 개혁은 실패했고 나라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매우 부패했고 큰 농장을 통해 부를 축적했었다. 그들이 개혁을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고려는 개혁파 세력인 이성계라는 장군에 의해 멸망했다. 이성계는 고려의 장군 출신으로 조선을 세운 사람이다.

공민왕에게 호위대인 자제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공민왕이 노국공주의 죽음 이후 미치게 되어 동성애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실제로 있었다. 그가 자제위의 홍륜과 최만생에 의해 살해된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들이 공민왕을 배반하고 반대파에 협조해서 공민왕을 살해한 것인지, 아니면 영화에서처럼 공민왕이 실제로 동성애 행위를 하다가 살해된 것인지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파가 공민왕을 암살한 뒤 명분을 만들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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